성체조배, 이 자료는 성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의 역서(방효익 바오로 신부)와 묵상기도와 성체조배(박종인 라이문도 신부, 가르멜수도회)를 참조하여 편집하였음을 밝힌다. 참고로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에는 어둔밤, 가르멜의 산길, 영가, 사랑의 산 불꽃 등이 있으며, 이들 저서는 방효익 신부님에 의해 번역 출간되어 있다.
성체조배
목차
1. 개요
1) 하느님의 현존체험
2) 미사성제와 실체변화
3) 우정의 나눔
4) 하느님이 계신 성전이며 작은 하늘인 영혼
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6) 묵상기도로 하는 하느님 현존수업
2. 성체조배 방법
1) 몸의 자세
2) 마음의 자세
3) 기도와 사도직
① 주님과 일치하는 기도의 효과와 필요성
② 올바른 기도와 주님과의 일치가 필요한 사도직
4) 하느님 현존수업
5) 구송기도로 하는 성체조배와 묵상기도
6)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만나는 예수님과 성모님
7)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에 의한 성체조배
3. 맺음말
1. 개요
1) 하느님 현존체험
일단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면 현시된 성체 앞에서 경의를 표하고 장궤를 한 다음 성호를 긋는다. 성체 안에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계신 예수님께서 지금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신다고 믿는다. 사실 예수님은 성체 성사 안에 영혼과 육신을 취하신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으로서 실제로 현존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이때 우리는 육안으로는 예수님의 모습을 뵐 수 없지만,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으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리고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 나름대로 상상할 수 있다. 상상한 그 예수님을 실제로 살아 계신 분으로 내 앞에 가까이 모신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믿고 실제로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했다면 하느님을 실제로 만난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현존체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체 안에 예수님이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2) 미사성제와 실체변화
미사성제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관과 제물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미사인 피 흘림 있는 갈바리아 동산의 십자가상 제사에서, 예수님은 제관으로서 피를 흘리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심으로써 산 제물이 되셨다.
피 흘림 없는 제사인 미사성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관이시고 동시에 제물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참 제물이신 예수님의 봉헌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세례 성사를 통해 영혼의 인호를 받고 그리스도와 결합된 일반적인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1베드 2, 9 참조). 사제는 직무적인 제관이며, 은총 지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일반적인 제관으로서 미사 때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제관이 되어 일반적인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9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 9) |
이때 우리와 함께 자신을 봉헌하시는 제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물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빵과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미사 중에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축성된 다음에도 빵과 포도주는 비록 그 모양과 맛은 그대로 있지만 실체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것이다. 이것을 실체변화(實體變化)라고 한다. 실체변화된 성체와 성혈 안에는 예수님이 참으로 실제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 장소적(場所的, localiter)으로 계시지 않고 실체적(實體的, substantialier)으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은 지금 나를 성체 안에서 바라보고 계신다.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체 성사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의 영혼 안에도 가까이 계신다.
그러므로 성체조배를 할 때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 뵈어도 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 뵈어도 된다. 오히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내 눈앞에 가까이 모시고 바라 뵙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쉽다. 성체 안에도 계시고 내 안에도 계신 예수님은 같은 하느님이시므로 자기가 가장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3) 우정의 나눔
마음의 기도는 성체 안에 그리고 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남이며 우정의 나눔이다. 비록 성체 조배실에서 현시된 성체 앞에 있을 때라 하더라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기도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과 자주 만나 대화하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성체조배 한 시간 동안에는 보통 때보다 더 친밀하게 예수님만을 만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에서 떠나 예수님에게 눈길을 드리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우리의 눈길을 드리는 것 이상 더 바라지 않으신다.
4) 하느님이 계신 성전이며 작은 하늘인 영혼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은,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나는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느님 오른편에도 계시지만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 곧 성체와 우리 영혼 안에 현존하신다. 예수님의 성체를 모신 곳을 감실이라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집”(성 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이 계신 성전”(1코린 3, 16; 6, 19), “영혼의 작은 하늘”(완덕의 길 28, 5)이다.
16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19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 19) |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여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사도들은 이 목격한 사실을, 곧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심을, 목숨을 내어놓고 증거했다. 사도들이 증언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성체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와 함께 서로 마주 바라보며 마음과 정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 뵈오려고 노력하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롭고 쓸쓸하게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 혼자 계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당신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영혼 안에 계시면서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신다.
성체조배를 하는 이들은 성체조배를 하면서 우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진실하게 바라보시는 예수님께 사랑의 시선을 드린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사랑의 응답을 하는 것이다.
6) 묵상기도로 하는 하느님 현존수업
예수님은 하늘에서 하느님 오른편에 계실 뿐만 아니라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성체 안에 계시고 우리의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께 눈길을 드리는 것뿐이다. 기도의 스승인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당신의 마음의 기도를 말하고 있다.
“나는 내 안에 현존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앞에 가까이 모시고 바라 뵈오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기도방법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바라 뵈었습니다. 나는 마치 깜깜한 방에 있거나 장님인 것처럼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그분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믿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꼭 이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자서전 9장 발췌 인용)
2. 성체조배 방법
1) 몸의 자세
성체조배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마주 바라봄이며 대화이므로 이것은 묵상기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묵상기도 때에 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를 성체 앞에서 취하면 된다.
몸의 자세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자세가 아니라,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자세, 곧 함께 있으면서 서로 바라보며 만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의 맨눈으로 예수님을 뵙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바탕으로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바라 뵙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때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성체조배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 뵙는 일이므로 다른 일체의 사물들을 마음에서 비우고 오직 예수님만 앞에 모시고 뵙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맞대면하여 서로 마주 보는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얼굴을 들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 뵙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때 머리를 들지 않고 앞으로 숙이는 것은 생각하는 자세가 되기 쉽고 육체적으로도 훨씬 피로한 자세이다. 머리의 무게가 무거우므로 머리를 쳐들고 머리가 아래 중심부와 수직이 되도록 하면 힘이 반밖에 들지 않는다. 이때 눈을 감은 상태로 예수님을 정면으로 바라 뵙는데, 마음으로 예수님이 앞에 계신다고 믿으면서 마음의 눈길을 예수님께 드린다. 기도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이므로 머리를 들고 예수님을 바라 뵙는 것을 결코 겸손이 모자라거나 교만한 자세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앞에 가까이 모시고 정면으로 바라 뵙는 것은 오히려 정다운 마주 바라봄이며 만남의 자세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그리고 가능한 한 가까이 일치된 자세를 취하기를 원하신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영혼 안에 그리고 내 눈앞에 가까이 계신 것이다.
① 가슴을 펴고 허리뼈를 앞으로 내밀어 목과 머리를 꼿꼿이 세운다.
“안일과 기도는 서로 용납되지 않습니다.”(완덕의 길 4, 2) 안일한 자세로 기도를 하면 졸음이 오거나 분심이 들기 쉽다. 그러므로 기도 자세로는 무릎을 높이 꿇는 장궤 자세가 가장 좋다. 이때 무릎을 붙이지 말고 약간 떼어서 꿇고 배와 가슴은 앞으로 펴서 내민다. 허리뼈가 활처럼 휘게 만들며 엉덩이는 뒤로 빼고 양발을 붙이는 것보다 약간 벌리는 것이 낫다. 이렇게 하여 백회(百會, 정수리)와 회음(會陰, 항문과 요도 사이의 아래 중앙 부분)이 수직이 되게 하면 된다. 팔꿈치와 어깨를 뒤로 젖힐수록 좋은 자세가 나온다. 이러한 자세를 취할 때 몸무게의 압력은 반밖에 받지 않고 호흡이 잘되며 소화나 혈액 순환이 원활하게 돈다. 우리가 원래 태어났던 형태(동물이나 사람은 태어날 때 허리가 활처럼 휘어져 꼬리뼈가 항문 쪽으로 나감)대로 몸을 펴주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모든 기관이 펴지고 기(氣)가 열리며 정신과 힘이 집중된다.
장궤를 하다가 힘이 들 경우에는 꿇어앉는 방법도 있는데, 꿇어앉으면 약 15분 후에는 발이 저려 온다. 그러므로 기도 의자(비스듬한 기도 밑 받침대)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때도 무릎을 약간 벌리며 몸은 바르게 세우고 발은 양쪽으로 넓혀 준다. 이때 엉덩이는 뒤로 나가게 되고 허리뼈는 활처럼 휘어 들어가면서 목과 머리는 꼿꼿이 세우게 되고 가슴은 벌어진다. 이렇게 하려면 허리를 펴고 가능한 한 넓게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하며 목과 머리는 똑바로 세우고 가슴을 펴야 한다.
두 뼘 정도(약 30㎝) 높이의 등받이 없는 의자나 낮은 의자에 앉아서 기도해도 좋다. 이때도 백회와 회음이 수직이 되게 앉는다. 어깨에 힘을 빼고 엉덩이와 엉덩이 위의 허리의 힘으로 앉게 되는데 이 허리가 활처럼 휜 것이 곧고 바른 자세이다.
② 묵상 및 명상 자세와 하느님 현존수업 자세의 다른 점
가부좌나 선(禪) 자세는 불교에서 하는 자세이겠지만,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바라 뵈며 만나는 자세로는 적합지 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묵상이라면 몰라도 기도는 주님을 앞에 모시고 대화하며 서로 마주 보는 것이므로 예수님 앞에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웃어른 앞에서 예의를 지키듯이 기도를 할 때도 예수님이 앞에 계시므로 예수님 앞에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가부좌나 선 자세는 대상이 없이 혼자서 명상을 하거나 생각을 하는 자세로는 적합하겠지만, 생각이나 묵상이나 명상이 아닌, 주님과의 맞대면인 기도의 자세는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있는 자세를 취해야 마땅하다. 물론 아플 때나 힘이 없을 때는 눕거나 편안한 자세를 취해도 되지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바라 뵈며 함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결코 생각이나 추리나 명상이 아니다. 대상을 2인칭인 ‘너’로 가까이 모시고 바라보며 만나는 살아 있는 사랑의 행위이다. 비록 눈으로 뵙지는 못하지만, 신앙과 마음과 영혼의 눈으로 실제로 바라 뵙는 것이기 때문에 앞에 아무도 안 계신 것처럼 그러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우시고 사랑이 많으시므로 어떠한 자세로 기도를 해도 다 받아들이시겠지만, 우리 편에서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겸손한 태도란 머리를 앞으로 꾸부리는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머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만나는 자세로 들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미천한 나를 당신과의 대화의 상대로 삼아 주신 것에 대해 겸손하고 황공한 마음의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기도가 참으로 살아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나와 살아 있는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살아 있는 만남의 기도 자세는 생각이나 묵상하는 자세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기도하는 그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이 기도를 하는 것인지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대강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를 꾸부리고 있을 때는 생각을 하는 자세이거나 분심이 든 자세이고, 몸과 머리를 똑바로 펴고 하는 기도 자세는, 물론 중간 중간에 분심이 들기도 하지만, 주님과 만나는 노력을 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2) 마음의 자세
이제 성체 앞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 먼저 성호를 긋고 잠깐 양심 성찰을 한 후 고백의 기도를 한다. 이때 여럿이서 기도를 하지만 예수님과 나와는 단둘이서 만나는 것이므로, 마치 내가 사막에서 혼자 예수님하고만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짝으로 삼게 된다.
분심이 들지만, 오성이나 기억은 미치광이처럼 놓아두고 의지만은 줄곧 예수님께로 향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의지만이 우리 행동의 주인이다. 비록 우리가 나약해서 오랫동안 주님과 눈을 마주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순간 잠깐씩 주님을 만나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이것을 하느님 현존수업이라고 한다.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의 데레사 성녀도 예수님을 가까이 앞에 모시고 바라 뵈오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이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설사 이것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잠깐잠깐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분심이 적게 들기 위해서는 정성스럽게 그리고 진지하게 이 기도 시간에 임해야 한다. 짧은 시간을 내서 이왕 바치기로 한 이상 군마음 딴생각이 없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을 절대화시키고 다른 세상일들은 상대화시켜야 할 것이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기도하러 기도소에 들어갈 때, 수도원의 여러 가지 일들을 “너는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하면서 마음에서 떼어 버리고 오롯한 마음으로 주님만을 사랑하고 만나기 위해서 기도소에 들어갔다고 한다. 마음을 허술하게 먹으면서 분심이 들어오건 말건 공상이나 분심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면 주님을 만나는 기도가 잘 될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안으로 거두어들이기만 한다면 기도 안에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을 하느님 현존체험이라 하는데 이 만남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일이며 주님께서도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하기 싫은 것은 살아 있는 예수님과의 실질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기도 안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매번 만나는 사람은 기도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며 힘과 기쁨이 솟아오른다. 왜냐하면, 생명의 빵이시고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을 기도 안에서 실제로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동반자로 모시고 서로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기도인데, 이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추리나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주님을 바라 뵙는 것이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오랫동안 못한다 해도 잠깐씩 주님을 앞에 모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으면서 예수님을 바라 뵙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이탈하고 보화이신 주님만을 바라 뵈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태 6, 21)고 하셨다. 주님을 바라 뵈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바라볼 수는 없다. 주님을 바라 뵙기 위해서는 주님 아닌 다른 모든 것에서 눈을 떼어야 한다.
21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
세상 것에서 마음을 떼어 주님을 모시고 살며 영혼 안에, 그리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만을 바라 뵈올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관상자라 할 수 있다.
관상생활이란 살아 계신 예수님을 오롯한 마음으로 모시고 바라뵈며 친교를 나누는 생활이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역할이 관상자의 역할이다. 예수님께서 마르타를 나무라시면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너무나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하고 걱정이 많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몫을 택했다.”라고 하셨다. 마리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눈길과 사랑을 드리는 사랑의 행위를 한 것이다. 사실은 마르타보다 마리아가 일을 더 많이 한 것이다. 마르타의 일은 이 지상에서 끝나고 마는 일이지만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라 뵙고 사랑하는 이 일은 천국에 가서도 계속될 하느님 사랑의 행위이다.
41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 1-42) |
3) 기도와 사도직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는 그 자체가 훌륭한 사도직이다.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 5)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고, 일치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이상으로 예수님께서 손수 해 주시므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결과가 된다.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 |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줄곧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 예수님을 닮게 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성덕에 나아가며 많은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되는 것이다. 많은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데 관상자들은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과 함께 늘 생활하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기가 쉽다. 마치 성모님처럼 관상자들도 천상 은총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① 주님과 일치하는 기도의 효과와 필요성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학문을 통한 것보다 더 많은 빛과 힘과 은총을 얻게 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을 영원히 소유하고 하느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목표를 정확하게 바라보게 되고 하늘나라를 향해서 갈 수 있는 힘을 받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 되고 세속과 육신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 기도를 통해서 마귀의 속임수를 알아낼 수 있고 마귀의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
기도로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쓰는 것이다. 하느님과 손을 잡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마치 사도들이 역풍에 시달리면서 배를 저어 갈 수 없었던 것처럼(마태 14, 24),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영성적인 발전은 보잘것없고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우리가 매일같이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만나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참다운 신앙심이 부족하고, 보이는 현실에만 집착하며 보이지 않는 현실인 하느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토록 마음을 세상 것에 빼앗기고 세상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과 세상의 모든 사물에서 이탈하여 주님께로 향하게 될 것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이 사실을 참으로 잘 깨달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헛된 지식이나 명예나 재물이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단 3분 이상을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늘 주님을 바라 뵙는 관상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화 데레사 성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수도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소임을 열심히 실천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소화 데레사 성녀는 항상 주님과 일치하여 모든 일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다. 그리고 성녀는 본성을 초월해서 초자연적인 애덕의 정신으로 이웃을 참으로 사랑했는데 그것은 성녀가 항상 주님과 일치했기 때문에 온 결과였다. “나는 하느님과 일치되는 그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성녀는 말했다.
② 올바른 기도와 주님과의 일치가 필요한 사도직
올바른 기도 생활과 주님과의 일치가 없이는 참다운 이웃사랑과 사도직 이행이 불가능하다.
하느님을 직접 기도 안에서 만나고 사랑하는 생활을 관상 생활이라 하고, 이웃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활동 생활이라고 한다. 우리는 활동과 관상을 잘 조화시켜서 우리 안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
활동하되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과 함께라면 그것은 활동인 동시에 관상 생활이 되는 것이고, 이제 기도 생활은 다만 기도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안에서도 늘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약하므로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에 만사를 제쳐 놓고 예수님을 바라뵈며 사랑하는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예수님과 성모님을 마음 안에 가까이 모시고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하게 된다.
주님과 전적으로 만나는 장소인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하느님의 것이 되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쓴 시간을 아까워해서도 안 되고 기도를 위해서는 시간이 부족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야말로 예수님과 일치하는 지름길이므로, 기도 없이는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며 사랑하지도 않으므로 주님과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주님과 만나서 서로 바라보고 일치가 되는 사랑의 행위이므로 주님과 생생한 일치가 이루어진다. 주님과 일치되면 될수록 자기를 끊고 십자가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의 뜻에 순명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곧 참다운 이웃사랑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
4) 하느님 현존수업
주님과의 일치인 이러한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할 때 지성을 가지고 추리하거나 생각을 하는 것보다 사랑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체조배 때에 어떤 책을 읽거나 묵상을 하는 것보다는 주님과 생생하게 만나는 하느님 현존수업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성체조배를 할 때 무엇을 많이 생각하려 하지 말고 또 무슨 묵상에다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보다 곧장 주님을 만나는 현존수업에 마음을 쓰는 것이 더 좋다. 물론 묵상도 중요하지만, 묵상은 아직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성체조배나 묵상기도 시간에 주님을 실제로 만나는 기도는 하지 않고 묵상만 한다면 마치 수박 속은 먹지 못하고 수박 겉만 핥는 결과가 된다.
기도로 주님과 만난다는 것은 마치 수박 겉만 핥는 것이 아니라 속을 먹고, 아기가 엄마 젖을 빨아 먹으며, 벌이 벌통에서 꿀을 빚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주님과 만나는 기도에 시간을 많이 쓰면 자연히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사랑과 정이 깊어진다. 이렇게 하는 것이 책이나 묵상을 통해서 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비결이다.
5) 구송기도로 하는 성체조배와 묵상기도
성체조배 때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를 하는 것을 마치 잘못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묵상기도 시간에 그리고 성체조배 시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인데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자주 나오는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는 하느님과 성모님을 만나고 일치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도이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구송기도라도 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이 곧 구송기도인 동시에 묵상기도가 된다고 했다. 문제는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드릴 때 예수님과 성모님을 앞에 모시고 바라뵈면서 참으로 대화가 되도록 드리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구송기도를 예수님과 성모님과 대화가 되도록 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은 곧 하느님과의 우정의 나눔 그리고 성모님과의 우정의 나눔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입술만 움직이고 생각은 다른 데가 있다면 그런 기도는 올바른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서로 눈이 맞은 상태로 마음을 나누는 기도가 되었다면 이것은 훌륭한 묵상기도가 된 것이다. 구송기도냐 묵상기도냐가 문제가 아니라 비록 구송기도라 할지라도 하느님과 만난 상태로 진실한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잘 드린다면 그것은 구송기도인 동시에 묵상기도이다.
우리는 나약하므로 오랫동안 주님을 앞에 모시고 줄곧 바라 뵙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갈 때 줄을 잡고 올라가듯이 이 십자가의 길이나 묵주기도로 하느님 현존수업을 하기는 아주 쉽고도 단순하고 좋은 방법이다.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드릴 때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도 안에서 만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곧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내가 지금 이 기도를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고, 성모송을 드릴 때는 성모님과 눈을 마주치며 드림으로써 매번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드릴 때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를 드리는 동안에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데 치중하고, 성모송을 드릴 때는 성모님을 만나는 것을 위주로 드린다. 이때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뜻을 생각하면서 드리는 것도 좋겠지만, 초보자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먼저 성모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데 주력함으로써, 나와 예수님 그리고 나와 성모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게 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서로 만나는 것이 생소하지 않으며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서로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가 되면 기도를 하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고 힘든 기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격적인 만남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실제로 만나게 되므로, 기도 생활이 몸에 배어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6)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만나는 예수님과 성모님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한 시간 동안의 성체조배 시간에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의 기도로 묵상기도가 되도록 성체조배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할 수도 있겠으나 이 방법으로 하면 매일 착실하게 그리고 시간의 낭비 없이 잘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하면서 기도 시간을 쓰기 때문에 구름 잡듯이 막연하게 하는 기도보다 더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준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가지고 하는 묵상기도가 너무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체조배나 묵상기도 때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면 아주 조금씩이지만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예수님과 성모님과의 만남의 횟수가 축적되어 나아가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과 성모님을 마음 안에 가까이 모시게 되고 친밀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어떤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을 자주 만남으로써 예수님과 성모님 안으로 들어가 동화되고 일치되는 것이다. 이때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일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자주 만나고 대화와 우정을 나누면 서로 사랑과 우정이 깊어지듯이, 예수님과 성모님께 자주 눈길을 드리며 만나면 예수님과 성모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고 친밀한 일치에 도달하게 된다. 기도할 때에 무엇을 많이 생각하고 추리나 묵상이나 명상을 하는 것이 아주 대단한 일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사실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단순한 기도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며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모님을 실제로 신앙과 마음으로 만났으면 그것은 이미 목표에 도달한 것이며, 단지 생각이나 묵상이나 추리나 명상으로 그 시간을 다 보냈다면 겉으로는 잎이 무성하고 훌륭해 보이지만 아직 열매는 없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성체조배 때 시간을 낭비함이 없이 예수님을 만나는 현존수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제 약식 십자가의 길 기도로써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를 하는 방법을 설명해 본다. 우선,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허겁지겁 아직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드리기보다는 먼저 예수님을 앞에 현존시키고 예수님과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마음이 통했으면 주님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곧, 예수님 현존 앞에서 서로 바라보면서 드리는 것이다. 이때 서로 바라보고 서로 아는 것이 우정의 나눔인 묵상기도이다.
‘하늘에 계신’ 할 때 하늘은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마음속 곧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면서 우리 영혼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본다. 왜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면 하느님은 순수 영이신데 천사나 영이 아닌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바라 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을 바라 뵙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구체적인 사람이 되신 몸이므로 우리가 성모님이나 성인 성녀들을 상상할 수 있듯이 그렇게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곧 성부의 얼굴은 상상할 수 없으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우리 각자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 뵐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어떤 화면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 곧 환시와 같은 만남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어슴푸레하게나마 지금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내 앞에 가까이 계시면서 나를 진실한 눈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고 믿었으면 예수님을 기도 안에서 만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아버지를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을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기도 안에서 바라 뵙는 것은 옳은 일이고 기도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만남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만난다고 함은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데 내 생각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를 바라보신다고 상상했으면 그것은 헛된 만남이겠지만 실제로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눈길을 주시므로 나도 예수님께 눈길을 드리며 만났다면 이것은 참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도 안에서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천국에 가서 맞대면하고 만나 뵐 바로 그 예수님이시다. 이 세상에서는 기도 안에서 신앙으로 희미하게 밖에 바라 뵐 수 없지만, 천국에 가서는, 영광의 빛을 받아,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환히 바라 뵙게 될 것이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비록 희미하게 밖에는 바라 뵐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국에서 만나 뵙게 될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매일 만나는 예수님과 성모님은 천국에 가서 맞대면하고 만나 뵙게 될 바로 그 예수님과 성모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모님 앞에 실제로 있는 몸과 마음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7)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에 의한 성제조배
① 십자가의 길 기도
십사 처를 돌지 않고 성체 조배실에 앉아서 마음으로 14처를 돌며, 먼저 주님의 기도를 드린 다음,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하고 사형 선고받으시는 장면을 떠올린 다음 묵상은 생략하고 현재 이 수난의 장면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예수님과 생생하게 눈을 마주친다.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을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하면서 예수님께 인사를 드린다. 그다음에 나오는 기도서의 기도문을 생략하고 예수님과 서로 눈이 마주친 상태로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매번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저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영혼의 작은 하늘인 내 안을 바라보고 ‘우리 아버지’ 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본다. 성모송을 드릴 때는 아름다우신 성모님께서 사랑스럽게 나를 바라보신다고 믿으면서 성모님을 내 앞에 가까이 모시고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일치된 상태로 성모송을 드린다. 결국,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난 일치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다음에 삼위일체 하느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영광송을 드리고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마음속에 주님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하면서 마음속으로 제2처로 간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에서 위와 같은 요령으로 그 장면을 마음속에 떠올린 후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기도문은 생략하고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데, 이때 예수님의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눈과 마주친 상태로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이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이 마음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성모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그 장면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결국,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수난의 어떤 장면을 묵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수난 안에서 수난을 받고 계신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서 예수님, 성모님하고 잠깐이라도 서로 눈이 마주쳤으면 그것은 훌륭한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드릴 때 예수님과 성모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 뵙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 때 예수님과 아주 잠깐이라도 눈이 마주치고 서로 알아보며 마음이 통했으면 그것으로 훌륭한 묵상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성모님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요령으로 1처에서부터 14처까지 십자가의 길이라는 줄을 잡고 한 시간 동안 묵상기도를 하면 졸리거나 지루하지도 않고 분심이 났다가도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오기가 쉬우며 매일 같이 기도를 빼놓지 않고 잘할 수 있게 된다. 하루에 두 번 묵상기도를 한다고 할 때 아침에는 약식 십자가의 길 기도(14처를 직접 돌지 않고 묵상기도 자세로 하며 긴 기도문을 생략,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마음으로 기도 안에서 만나는 기도)로써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하고, 오후에는 묵주기도로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를 하자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송기도인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정해 놓고 하면 매일 자신을 기도 생활로 이끌 수 있고, 여간해서는 빼놓지 않고 매일같이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를 하는 습관을 얻게 된다.
② 묵주기도
묵주기도로 묵상기도를 하면 각 신비를 묵상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신비의 묵상에만 시간을 쓰게 되면 정작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날 시간이 없으므로 하느님 현존체험이 덜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묵상기도 때처럼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성모송을 드릴 때는 성모님을 만나는 것을 위주로 하며 묵주기도 5단을 묵상기도로 바친다. 이때 현의 묵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가를 알게 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너무 현의 묵상에만 매달리다 보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존체험의 시간을 잃을 수 있다.
3. 맺음말
다시 간추려서 말한다면 성체조배도 결국은 묵상기도로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성체조배 때 무엇보다도 하느님 현존수업에 힘쓰는 것이 더 좋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노력인 하느님 현존수업을 해야 하는데 하느님 현존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눈길을 드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은 성경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세상 마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마태 28, 20 참조)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후에 하느님의 오른편에도 계시지만 교회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곧,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 안에 예수님은 참으로 실제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신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계신 성전인지 모르십니까.”(1코린 3, 19; 6, 19)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고 하셨습니다(요한 14, 23 참조).
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16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19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 19) 23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 |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밖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였고,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초자연적인 시현을 통해서 자신 안에 가까이 계신 예수님의 인성을 여러 번 목격하고 체험했다. 그래서 성녀는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이 계신 작은 하늘이고 예수님이 계신 궁전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 안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이 있고, 그 아름다운 영혼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시면 혼자 오실 성싶습니까?”(완덕의 길 28, 13)라고 하면서 우리의 영혼 안에는 성모님과 성인 성녀들이 계신다고 하였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이 계신 성전이고 궁전이며 하늘이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을 모신 감실이므로 성체조배 밖에서도 예수님을 가까이 바라 뵐 수 있다. 그리고 성체조배에서도, 비록 성체가 현시된 경우에라도, 내 안에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다. 이때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나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예수님은 같은 예수님이시다.
둘째, 성체조배나 묵상기도 방법은 성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앞에 가까이 모시고 바라 뵙는 하느님 현존수업이다.
마치 캄캄한 방에 있거나 장님인 것처럼 그렇게 신앙의 눈, 마음의 눈,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하는 편이 훨씬 낫다.
셋째, 묵상기도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과의 우정의 나눔인데 자주 단둘이서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우선 묵상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배우며 묵상을 하는 것은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늘 함께 있기를 바라고, 마주 바라보며 마음을 나누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 주님께 항상 눈길을 드리며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것은 예수님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성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는 이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느님을 자주 만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 사랑이 진실하고 깊으냐에 따라 예수님과의 만남이 더 친밀하고 깊고 진실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갚음을 바라지 않고 드리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하느님께 드리는 데 열중하고 자주자주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
넷째, 구송기도라도 주님과 일치해서 정성스럽게 잘 드리면 묵상기도가 되는 것이다.
묵상기도는 하느님과의 우정의 나눔인데(예수의 데레사 성녀 자서전 8, 5 참조) 구송기도로써 예수님과 일치해서 대화가 되도록 드린다면 하느님과의 우정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구송기도인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자주 나오는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성체조배와 묵상기도를 위한 좋은 방법이며 수단이다. 그러므로 성체조배실에 들어가서 성체조배를 할 때 책을 읽거나 묵상을 하는 것보다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로써 하느님 현존수업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우리가 성체조배 때나 묵상기도 때에 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도 안에서 실제로 만나고 서로 우정을 나누는 데 있으므로,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모송을 통해서 성모님을 만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는 하느님 현존수업을 위해서 아주 탁월하고 안전하며 확실한 방법이다.
이것은 기도의 스승인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완덕의 길」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할 때 우리에게 제시한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성녀는 구송기도로써 훌륭하게 묵상기도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송기도와 묵상기도가 입으로 하고 마음으로 하는 차이가 있지만, 구송기도라도 마음으로 진실하게 대화가 되도록 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이 곧 구송기도인 동시에 묵상기도이다.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만남과 우정의 나눔인데 우리는 구송기도인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조배 때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로 성체조배를 하는 것은 아주 훌륭하고도 좋은 일이며 예수님과 성모님을 가까이 만나고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다. 성체조배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만나고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과의 우정의 나눔’인 묵상기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조배를 할 때 기도의 스승인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구송기도를 통한 묵상기도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일은 아주 훌륭한 성체조배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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