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기도와 관상기도, 이 자료는 성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의 역서(방효익 바오로 신부)와 묵상기도와 성체조배(박종인 라이문도 신부, 가르멜수도회)를 참조하여 편집하였음을 밝힌다. 참고로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에는 어둔밤, 가르멜의 산길, 영가, 사랑의 산 불꽃 등이 있으며, 이들 저서는 방효익 신부님에 의해 번역 출간되어 있다.
묵상기도와 관상기도
목차
1. 묵상과 묵상기도의 차이
2. 묵상기도는 사랑의 행위
3.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
4. 자녀의 청을 들어주시는 하느님
5.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하느님 현존수업 방법
6.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7. 묵상기도의 순서
8. 묵상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
9. 구송기도의 묵상기도화
10. 마음으로 가까이 모시는 예수님
11. 굳은 결심과 항구심
12. 쉽고 효과적인 묵상기도 방법
13. 관상기도의 수동성
14. 마음으로 하는 묵상기도
15. 기도로 매일 만나는 예수님과 성모님
1. 묵상과 묵상기도의 차이
묵상기도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과의 우정의 나눔이며 정다운 대화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하고 사랑을 교환하며 서로 사귀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내 안에 가까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으로 하는 내적 기도인 묵상기도는 단순히 하느님이나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추리하는 묵상이나 명상이 아니라, 묵상과 함께 하느님을 직접 기도 안에서 인격적으로 맞대면하여 만나고 서로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이고 현실적인 만남이다.
묵상(黙想, meditazione)이 지성적 추리나 생각 또는 명상을 하는 지성의 작용이라면, 묵상기도(黙想祈禱, orazione mentale)는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의지의 작용이다. 묵상은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사변적(思辨的)이라고 한다면 묵상기도는 실존적(實存的)이며 현실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의 데레사는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랑은 의지의 작용이며 기도는 의지로 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묵상은 ‘나와 너’로 만나는 친밀한 사랑의 살아 있는 관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대상이 다만 ‘그분’ 또는 ‘그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경우는 대상이 ‘너’로서 2인칭이 되는 것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나는 그분을 무척 사랑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묵상으로 아무리 큰 사랑을 느꼈다 해도 ‘나와 너’와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기도는 아니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내적으로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대화가 되고 마음이 통했으므로 그것은 기도이다.
2. 묵상기도는 사랑의 행위
우리가 기도하는 첫째 목적은 하느님을 기도 안에서 만나고 사랑하며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데 있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기도 외에 다른 더 좋은 길이 없다고 했다(완덕의 길 21-29 참조).
“묵상기도란 누가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랑해 주시는 분과 함께, 자주자주, 단둘이 만나서, 우정을 나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자서전 8, 5)라고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묵상기도를 정의(定意)했다. 묵상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웃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활동 생활이라고 한다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직접 바라 뵙고 사랑하는 생활을 관상 생활이라고 한다.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마르타는 활동 생활을 나타내고 마리아는 관상 생활을 나타낸다(루카 10, 38-42 참조).
38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38-42) |
3.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는 활동 생활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을 위로해 드리고 사랑해 드리는 관상 생활은 더욱더 중요하다. 사랑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지만 참다운 하느님 사랑이 없으면 참다운 이웃사랑은 불가능하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행위를 한 것이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카 10, 42 참조)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까닭은 활동 생활은 현세에서 끝나고 말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 생활은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해설에 따르면, 마르타는 마리아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마리아가 마르타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귀중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해설에 따르면 <영가> 노래 29(CA 20) 이어지는 노래를 위한 서론 1. 이 영혼의 정신이 다른 것에 전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잃었으며 오직 사랑만 얻었다. 이에 대하여 말한다면, 활동적인 삶과 다른 외적인 행위들은 모두 없어지고, 신랑이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라고 말했던 것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안에서 계속되는 사랑의 수련이며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랑이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듯이(루카 10, 41) 마리아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격려하는 것이다. 신랑은 마르타가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다른 활동적인 것에 젖어있기 때문에 자기 발치에서 멀리 떨어뜨리기 원했던 것이다. [마르타는 모든 것을 다 했으나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결국, 마르타는 거꾸로 알아들은 것이며, 사랑보다 더 좋은 일과 필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아가(雅歌)에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몰아내면서 신부를 옹호한다. 거기에서 피조물들은 사랑의 영적인 잠을 자는 신부를 방해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이해한다.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아가 2, 7; 3, 5; 8, 4). 2. 주의해야 할 것은, 혹시 영혼이 아직도 사랑의 일치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관상적 삶에서처럼 능동적 삶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미 신랑에게 도달했을 때에는 비록 하느님을 대단하게 섬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결정을 방해할 수 있는 외적인 행동이나 다른 이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비록 모든 일을 합쳤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지라도 하느님과 영혼에는 아주 작은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 더 값지고, 교회에 더욱 유익하다. 신랑의 마음에 들려고 했고, 교회에 도움이 되려고 했던 간절한 열망 때문에 마리아는 이 사랑을 진정으로 넘겨드리기 위해서 광야에 삼십 년 동안 숨어 있었다.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실천이 활동적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작은 실천이 교회에 유익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3. 어떤 영혼이 고독한 사랑의 단계(관상기도)에 들어섰을 때 외적인 것들과 활동적인 것들에 매달리려고 한다면 비록 작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활력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영혼에게는 물론 교회에게 엄청난 해로움을 끼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를 몰아내신다. 누가 마리아를 멀리 떼어놓을 것이며, 자기 절제 없이 누가 감히 (주님 앞에) 머무를 수 있을까? 이런 사랑의 목적을 위해 우리가 태어났다. 주의할 것은, 매우 활동적인 사람들은 자기 설교와 외적인 일들로 세상을 묶어놓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높은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자신의 이런 생각들에서 나오는 좋은 모범적인 것들을 버린다면, 활동하려는 시간의 반만이라도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마음에 더 들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하나의 일을 기도하면서, 그리고 기도 안에서 영적 힘을 얻으면서 할 때에 (기도 없이 하는) 천 개의 일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물론 해로움만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쭐거리려고 하는 소금에서(마태 5,13) 너희를 자유롭게 하신다. 비록 외적으로 무엇을 많이 했다고 여겨질지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선행이란 하느님을 통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고 활동을 하는 노력의 절반만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 생활에 쓸 것 같으면 더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고, 교회에 더 유익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소화 데레사 성녀가 그러했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자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자녀의 청을 들어주시는 하느님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사귀고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겸손한 자녀의 청을 즐겨 들어 주신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사랑밖에 주님을 위해서 드린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랑밖에 원하시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큰 사랑을 가지고 행한 작은 희생과 기도는 주님 대전에 위대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의인의 청을 들어주시는(야고 5, 14-16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의 간구로 많은 은총을 내려 주시며 많은 영혼을 구하시는 것이다.
14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15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 15-16) |
5.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하느님 현존수업 방법
묵상기도 방법에 대해서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자서전,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참조). 성녀는 자서전에서 “나는 내 안에 현존하시는 우리의 선이시오 지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앞에 현존시키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 이것이 나의 기도방법이었다. 나는 그분을 인간으로서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캄캄한 방에 있거나 장님인 것처럼 내가 그분하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분이 여기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지만 보지는 못했다. 나는 꼭 이런 식으로 기도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영혼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완덕의 길 28, 11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도 나중에야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고백록 10, 27 참조). 특히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깊은 초자연적 은혜와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하느님이 참으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6.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1코린 3, 16-17; 6, 19)라고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고 성령을 모신 궁전이라고 말했다. 요한 사도도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라고 말했다.
16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 16-17) 19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 19 ) 23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 |
하느님이 우리 안에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격자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했다(2코린 13, 5 참조). 성체 성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제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안에도 참으로, 실제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마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하신 말씀대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것이다.
5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2코린 13, 5) 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지만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므로 현세에서는 순수 영이신 하느님을 직접 바라 뵙지는 못하고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 뵙는 것이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 9)이라고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에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기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상상하고 믿으면서 만나 뵈올 때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9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 9) |
7. 묵상기도의 순서
묵상기도를 하는 순서를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성호와 양심 성찰, 그리고 죄의 고백, 그 다음에 할 일은 여러분은 혼자이기 때문에, 짝을 찾는 일입니다.
죄의 고백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가슴을 치며) 제 탓이요 (가슴을 치며)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
짝이라면 여러분이 바치려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바로 그 스승님보다 더 좋은 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님을 여러분 곁에 모시고, 그 얼마나 큰 사랑과 겸손을 가지고 여러분을 가르치고 계시는지를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한사코 그 좋으신 님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해 보십시오.”(완덕의 길 26,1)
올바른 기도 5“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7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 5-8) 주님의 기도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 9-15) |
우리 기도의 동반자이며 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인성(人性)을 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서로 마주 바라볼 수 있다.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므로 순수 영이나 천사가 아닌 우리가 직접 바라 뵐 수 없지만,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성모님이나 성인 성녀들을 마음에 그릴 수 있듯이 우리 마음 안에 상상할 수 있다(성녀 예수의 데레사 자서전 22장 참조).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는 묵상기도를 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거나 동반자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다.
8. 묵상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
묵상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므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도의 동반자로 모시는 것이 묵상기도의 비결이다.
묵상기도는 하느님을 만나고 바라 뵈며 사랑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성녀는 여기에 대해, “내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만 골똘하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성을 가지고 숱한 추리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거창하고 아리송한 명상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을 보고만 있으라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모자라 오랫동안은 못한다 하더라도, 일순간 영혼의 눈을 주님께 돌리는 것쯤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추한 것을 보는 눈이 상상도 하지 못하리만큼 그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여러분의 님께서는 여러분한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그 앞에서 온갖 미운 짓, 더러운 짓을 다 해도 참아 주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외면함이 없으시거늘 밖의 것에서 눈을 떼어 몇 번이나마 당신께 눈길을 돌리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보십시오. 당신은 신부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당신을 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님은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당신께 눈길을 돌리는 것뿐, 당신 편에서 우리를 싫어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완덕의 길 26, 3)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을 때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주님과 눈길을 마주칠 수 있다. 묵상기도를 제대로 잘하기가 어려운 것은 만나 뵙는 상대인 하느님을 맨눈으로 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믿음만 있다면 신앙의 눈으로 가까이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다.
신앙의 눈, 영혼의 눈, 마음의 눈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앞에 모시고 바라 뵈려고 노력하는 것을 하느님 현존수업이라고 한다. 이 현존수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겠으나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등 구송기도로도 잘 할 수 있다.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을 드릴 때 건성으로 별 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기가 쉬운데, 이때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이 기도를 지금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이나 성모님과 서로 눈이 맞은 상태로 드린다면 건성으로 드리는 빈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과의 훌륭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9. 구송기도의 묵상기도화
구송기도라도 정신을 차리고 정성을 들여 잘 드리기만 하면 구송기도가 어떻게 대화인 묵상기도가 되는가에 대해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묵상기도와 구송기도의 구별이 입을 다물고 아니 다무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십시오. 입으로 외면서 그 말뜻을 다 알아듣고, 분명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것이 곧 묵상기도이면서 구송기도입니다. 그러나 혹시 누가 입으로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마음은 세속에 가 있으면서, 그래도 하느님과 이야기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존하신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데에는 지극한 공경을 하여야 하느니만큼, 예절을 갖추어서 대화하려면, 먼저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아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완덕의 길 22, 1).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성무일도나 로사리오 기도를 드릴 때, 내가 지금 이 기도를 누구에게 드리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을 앞에 모시고, 또 드리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겸손한 태도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성녀는 “우리가 성무일도나 로사리오를 외우기에 앞서 어떠한 분과 내가 이야기하며,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어찌 잘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자매들에게 다짐하고 싶은 말은, 구송기도를 외우기 전에 이 두 가지 요점에 정신을 잘 쓰기만 하면, 오랫동안 묵상에 잠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22, 3)라고 말한다.
10. 마음으로 가까이 모시는 예수님
성녀는 주님을 마음으로 가까이 모시라고 거듭 권고한다. “여러분은 주님을 마음으로 가까이 모십시오. 가까이 모시면서 깨치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어른과 이야기하려 들며, 어느 어른과 이야기하고 있는가를.”(완덕의 길 22, 7)
“하느님과 이야기하면서 딴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완덕의 길 22, 8) 하느님은 질투하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남편이신 하느님께서 싫어하실 것입니다. 따님들이여, 이것이 바로 묵상기도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묵상기도입니다. 이것을 깨치고 입으로 외우면서 기도를 드린다면, 아주 그만인 것입니다.”(완덕의 길 22, 8) 여기서 ‘이것’이란 하느님과 이야기하면서, 딴 것을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과 당신과만 사랑을 나누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말한다.
11. 굳은 결심과 항구심
기도는 하다 말다 해서는 안 되고 꾸준히 해야 한다. 하느님과 만나는 데까지 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출발해야 하며, “짧은 시간을 내어 당신께 드리려 했으면, 이왕 드리기로 한 이상 두 마음, 딴생각이 없이”, “굳게 다져진 일대 결심(determinacion determinada)"을 가지고(완덕의 길 23, 2 참조) 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생각하면서 한순간 바라뵈온 것까지도 낱낱이 상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한테 갚으실 때는 어찌나 세밀하신지, 당신을 생각하면서 눈 한번 치뜬 것마저 반드시 갚으실 것이니, 여러분은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완덕의 길 23, 3 참조)라고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말한다.
화살기도로 잠깐씩 주님께 눈길을 드리는 것도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신다면, 우리가 매일 묵상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만나고 바라 뵙는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12. 쉽고 효과적인 묵상기도 방법
묵상기도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의 길 기도나 묵주기도를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기도로 묵상기도를 할 때, 의자에 앉거나 무릎을 꿇거나 서서, 14처를 돌지 않고도 묵상기도 자세로 기도를 할 수 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예수님을 만나고, 성모송을 드릴 때는 성모님을 만나는 것을 반복한다. 수난의 장면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수난 장면 안에서의 예수님과 성모님을 만나고 서로 바라보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고요 속에 있기를 힘쓰면서”,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하면 마음에다가 말씀해 주십니다.” “스승은 소리를 질러야 제자가 알아들을 만큼 그렇게 먼 곳이 아닌 바로 곁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완덕의 길 24, 5)
“입으로 외우는 기도라도 누구와 이야기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잘하기만 하면, 어떻게 묵상과 따로 떼어서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여러 번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비는 말들을 어느 분에게 드리고 있느냐는 생각을 힘써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내를 가지고, 이렇듯 필요한 일에 익숙해지도록 힘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완덕의 길 24, 6)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기도할 때 예수님을 동반자로 모시고 “내가 비는 말들을 어느 분에게 드리고 있는가.”(완덕의 길 22-24장 참조)라는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도를 드릴 때 주님을 바라보면서 친밀한 사랑의 마음으로 드리게 된다.
13. 관상기도의 수동성
관상기도(수동적, 주부적 관상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만큼 내려 주시는 수동적인 기도로서 인간의 노력은 전혀 없고 온전히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관상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나 잘하라고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말한다. 그것은 구원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니 욕심을 내지 말 것이며, 그런 은혜를 달라고 하느님께 졸라대는 것은 겸손이 부족한 것이라고 성녀는 말한다.
<주부적 관상기도> 사랑이란 불과 같은 것이기에 , 수동적 밤에 들어가 정화된 영혼은 비밀스런 사랑(신비신학)을 가지고 자기와 모든 것을 떠나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관상기도에 머무르는 영혼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신비의 빛이 비치는 길을 걷는 것이며, 주부적 관상기도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상적 선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만큼,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에게 관상기도의 은총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머무르기 원한다면 신앙인은 철저하게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기를 주저하거나 자기 의지를 버리고 절제하기를 두려워하면서 마치 아가서 신부가 말하듯이 편안한 상태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결코 그분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세례성사의 은총을 되살려내지 못하고, 성체성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누구든지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루카 16, 13 참조) 모든 피조물과 그로부터 오는 욕망을 벗어 던지지 않고, 정화되지 않거나 숨어버리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줄지라도,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게 될 때 얻게 되는 최고의 행복에 이를 수 없다.(어둔밤, 작품해설 6.3 정화의 좁은길: “어두운 밤”, 방효익) |
구송기도를 완전히 바치는 영혼은 하느님께서 그를 초자연적인 경지까지 올려 주신다는 것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여러분들 생각에 구송기도는 아무리 완전히 바쳐 보아야 얻는 것이 적다 할까 봐, 나는 ‘주님의 기도’나 그 외의 구송기도를 외우는 동안이라도, 주님이 여러분을 아주 완전한 관상의 경지로 이끌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께 이야기하는 이의 말을 들으시고, 당신도 그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그 순간 당신은 사람의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인 오성의 힘을 정지시키고, 딴생각을 막고, 말문까지 막아 주시어서, 사람이 말을 하려 해도 못 하고, 한다 해도 가까스로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하늘 스승님이 가르치실 적에는 이처럼 소리도 없이, 인간의 기관들이 정지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 순간 기능을 발휘하면 해로울 뿐 이로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관은 까닭도 모르는 채 그냥 좋기만 하고, 영혼은 사랑에 불타면서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사랑하는 것 때문에 좋은 줄은 알면서도 어떻게 좋은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기쁨은 오성의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압니다. 의지가 그 기쁨을 얼싸안기는 하나 그 어찌 되는 줄을 역시 모릅니다. 모르지 않는 무엇이 조금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고생을 한꺼번에 다 치른다 해도, 이 기쁨을 얻기에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과 땅의 임자께서 내리시는 은혜이니, 결국 당신만이 당신답게 내리시는 것…. 따님들이여, 이것이 곧 완전한 관상입니다.“
14. 마음으로 하는 묵상기도
“이제 여러분은 관상기도가 어떻게 묵상기도와 다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묵상기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누구와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듯 크신 님과 감히 말을 주고받느냐는 것을 깨닫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생각, 가령 더할 나위 없이 그 님을 섬겨 드려야 할 우리이건만, 우리는 너무도 당신 섬기는 일에 소홀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역시 묵상이니, 무슨 까다로운 외국어인 양, 말만 들어도 놀랄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달리 구송기도란 ‘주님의 기도’ 나 ‘성모송’ 또는 다른 기도를 입으로 외워서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 보십시오. 묵상이 없는 음악은 얼마나 껄껄한 것이겠습니까? 아마 가사조차 번번이 틀려 나갈 것입니다.
구송기도인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에서는, 물론 하느님의 도우심과 함께, 약간이나마 우리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한 관상기도에 있어서,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몸소 모든 것을 다 해주시므로, 그것은 당신이 하시는 일이요, 우리의 본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25, 1-3)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등 구송기도를 잘 드리면 묵상기도가 될 수 있고, 묵상기도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을 자주 만나고 우정을 나누면 사랑이 깊어지고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게 된다. 관상기도는 수동적이므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지만, 묵상기도는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 곧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면 언제나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이 마음으로 하는 내적 기도인 묵상기도에 힘써야 할 것이다. 묵상기도는 하느님과의 우정의 나눔이므로 묵상기도를 자주 꾸준히 할수록 하느님과의 우정과 사랑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묵상기도는 하느님과 만나며 사랑을 나눈 역사, 곧 우정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도의 스승인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우리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묵상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므로, 기도할 때는 주님을 동반자로 마음 안에 가까이 모시고 마주 바라보라는 것과, 이 친밀한 만남과 대화를 위해서는 우리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을 바라 뵙는 것 이외에는 바라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구송기도를 잘 드리면 묵상기도가 될 수 있다. 곧, 구송기도(口誦祈禱)의 묵상기도화(黙想祈禱化)이다. 구송기도를 묵상기도가 되도록 잘 드리려면, 내가 이 기도를 어느 분에게 드리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구송기도라도 내가 이 기도를 누구에게 드리며, 드리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드리는 이 기도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이 구송기도이면서 묵상기도이다.
마음으로 하는 내적 기도인 묵상기도를 통해 이 세상에서부터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게 된다. 묵상기도 안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자주 만나게 되면 우정과 사랑이 깊어지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구송기도로 하는 묵상기도 안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진실하고도 현실적으로 만나면서 일치를 이룬다면 이것이 완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치로부터 이웃사랑이 나오고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이것을 하느님과의 초자연적인 상사(相似)의 일치 또는 변용(變容 transformac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하느님과의 일치 또는 합일(合一)이라 하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라 2, 20)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 20) |
15. 기도로 매일 만나는 예수님과 성모님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한 14, 6)고 하셨다. 우리는 묵상기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사귀는 일을 매일 충실하게 해야 한다. 또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성모 마리아를 기도 안에서 애정을 가지고 매일 충실히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묵상기도 시간을 별도로 정해 놓고 매일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매일 쉽게 묵상기도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아주 단순하고 쉬운 약식 십자가의 길 묵상기도와, 묵주기도의 「고통의 신비」로 하는 묵상기도 방법이다. 이 기도를 매일 하는 것은 묵상기도의 양(量)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이 기도를 충실히 함으로써 예수님과 성모님을 매일 만나면 하느님과의 일치인 완덕(完德)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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