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민족을 직접 다스리시려고,
에녹과 노아와 함께 하셨듯이
우상과 죄악으로 뒤범벅된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데려가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보내신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로 치시기 전에(창세 19,24)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니(창세 18,19),
그 이유에 해당하는 것들이
아브라함이 태어나 살던 곳에는 없었음이 분명하다.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
아브라함이 떠나야만 했던 그곳
칼데아 우르가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아브라함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 이유를 소돔과 고모라를 통해 미리 알아본다.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창세 18,20)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창세 18,21)라는 말씀처럼
죄악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설혹 죄악이 없다 하여도,
아브라함이 소돔을 두고 탄원하면서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챙세 18,23)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라고
말씀하셨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그 최소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의롭지 못한 세상이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창세 19,28)라고
참혹한 징벌의 결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롯이 소돔에서 떠나듯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났으니
아브라함이 살던 그곳은
참으로 불의와 불공정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떠나온 그곳의 상황은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라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징벌로 드러내신다.
그런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께서,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창세 18,19)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오죽하셨으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이렇게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겠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은 물론 그의 자손들은
정의가 없는 불의한 이민족들을
절대 닮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카인의 자손들이 이천여 년이 흘러도
셈의 자손들이 천여 년이 흘러도
도대체 바른 길로 돌아설 줄 몰랐기에
그들은 홍수와 바벨 팁 사건으로 소멸되고 흩어졌다.
그러기에 이제는 직접 하느님께서
소돔처럼 고모라처럼 죄로 물든 칼데아 땅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니,
이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민족으로 이루어진(탈출 19,6)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이다.
하느님의 부르심대로
정의를 가르치기 위해 선택된 아브라함은,
정의를 배워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나갈 자손들을 퍼트리고자
일흔다섯 살에 시작하여 175세가 되어 잠이 들 때까지
백 년, 즉 1세기 동안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2.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나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정의를 말씀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임금이 되시어
직접 민족을 다스리기 위함이시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으로,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라는
묵시적 계시이다.
거룩한 민족들로 구성된
사제들의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가나안으로 보내시고,
그의 손자 야곱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을
이집트로 가게 하신 모든 일은
하느님의 정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준비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소유하자,
그들의 이집트 노예 생활과
광야의 삶을 잊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롭지 못한 그들에게
이민족들을 보내어 치시고,
그들이 울부짖으면
판관들을 보내시어 고통을 덜어주시는데,
이는 혹여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정의와 공정을 다시 실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반 우려반의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바라심과는 달리
판관기에 드러나는 반복적인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이 하듯이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줄 지도자를 뽑아
그의 종으로 살아가려 한다.
3.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정의
어찌해야 그나마 올바른 삶을 이룰 것인지
작금의 세태,
아니 앞으로의 인류의 삶을 두고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성경에 내재되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께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 같다"(시편 90,4)라는
시편의 노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어떤 한 사람의 여정은 일순간에 불과하므로,
실개천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각각의 개인으로 구성된
사람의 삶의 여정이 모여야
인류의 역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를 이루는
각 사람들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역사 안에서
내가 등장하는 시점의 나의 모든 삶의 역사는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시는(시편 33,5)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역사가 하느님 안에서 흘러가야,
잠깐 왔다 가는 나의 삶이
영속으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역사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요한 17,3) 이어질 것이다.
과연 사람이란 육적으로 이슬방울에 불과하니(지혜 11,22),
순간적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사람들의 여정은
내 안의 마음에 새겨진 하느님 말씀 안에서(예레 31,33)
영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성전에서(1코린 3,16)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1테살 4,3).
다시 말하여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모든 것
즉 사람의 믿음,
사람의 희망,
사람의 사랑이
단지 어떤 한 인간의 독선적인 생각으로 시작해도
끝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카인의 본성에 따라(창세 4,8)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하기(루카 6,32)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악한자들도 자신만의 관점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공정하게 심판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
과연 인간사에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없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 안에서
믿음(창세 15,6; 집회 25,12)과
희망(시편 31,25; 시편 119,43)과
사랑(신명 6,5; 신명 11,1)을 실행해야 할 것이니,
"너희는 정의,
오직 정의만 따라야 한다"(신명 16,20)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주님을 경외함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요 믿음은 그분에 대한 의탁의 시작이다."(집회 25,12)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 31,25)
"당신 법규에 희망을 두니 제 입에서 진리의 말씀을 결코 거두지 마소서."(시편 119,43)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그분의 명령과 규정과 법규와 계명들을 늘 지켜야 한다."(신명 11,1)
"너희는 정의, 오직 정의만 따라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그렇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인
정의와 공정(창세 18,19)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모든 결과는
일부 몇몇의 정의가 있다 하여도 누적된 불의로 인해
성경에 드러나듯이
파멸과 멸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불의로 인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시대, 왜 정의를 부르짖는가?
에필로그마카베오기는 주로 BC 175년경부터 134년경까지의 40여 년 간의 기록으로,마카베오기부터 약 1300여 년 전에 발생한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40년 간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마카베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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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사람 사는 세상에서
파멸과 멸망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
즉 정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실천할 수 있는지?
서로서로 가르치고 배워서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이
"주님께서는 의로우시어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니
올곧은 이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시편 11,7)
"정의와 공정이 당신 어좌의 바탕
자애와 진실이 당신 앞에 서서 갑니다."(시편 89,15)라고 노래하니
호세아가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라고 응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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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시대 II, 고대 세계를 뒤흔든 아모리족(BC 2166-1102)
프롤로그아모리족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이집트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오게 될 시기와 이유에 대해 말씀하실 때"사 대째가 되어서야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아모리족의 죄악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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