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성

다윗의 '외침 속의 침묵'의 시간!

좋은생각으로 2024. 9. 16. 10:50

 

프롤로그

 

사울이 기브아 전투에서 살해된 뒤(1사무 31,5),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에 의해

유다의 임금이 되어 7년 6개월 동안 다스린다(2사무 2,4). 

 

한편 이스 보셋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2사무 2,9)

마하나임에서 이스라엘을 2년 동안 다스린 뒤

그가 부하들에게 살해 되자(2사무 4,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다(2사무 5,3) . 

 

그러므로 이스 보셋은 다윗이 유다 임금이 된 뒤

약 5년 뒤에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 보셋이 이스라엘 임금이 되기 전에

다윗에게는 이스라엘을 점령할 5년 여의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아래 연대표 참조).

 

 

다윗이 헤브론에서, 이스 보셋은 마하나임에서 임금이 되다(2사무 2,1 - 4,12)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유다의 임금이 되었지만,유다를 제외한 다른 열한 지파들은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네르가 추대한 이스보셋을 중심으로요르단 건너 마하나임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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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외침 속의 침묵의 시간

 

다시 말하여 사울의 부하들이 필리스티아인들에 의해 모두 죽고(1사무 31,6),

다윗은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이스라엘을 점령할 수 있었던 시기이다. .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앞에 두고

다윗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기간 동안 그가 한 행동은 이스라엘에,

아니 인간 역사에 과연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영겁의 시간 속에 찰나인,

유다 임금 다윗의 5년 여의 침묵의 시간에 대해 화두를 던져본다. 


다윗의 보속의 시간

 

다윗은,

사무엘이 기원전 1014년 경에 사망한 뒤,

갓 임금 아키스에게 망명한다(1사무 27,1-2). 

그곳에서 다윗의 활동은

아키스가 다윗에게 치클락을 내어줄 정도로

그를 믿게 만들었다(1사무 27,12). 

 

그런데 사울의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인들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1사무 28,4).

필리스티아인들의 군대 수는

사울의 가슴을 몹시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많았다(1사무 28,5).

 

오죽했으면 사울이 영매를 찾아 사무엘을 만나려 했을까?

결국에 그는  세 아들과 함께

길보아산에서 살해되어 쓰러진다(1사무 31,1.2). 

이때부터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이

이스라엘 임금이 될 때까지 약 5년이 걸린다.  

 

다윗은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들에게는

5년이라는 기간은 매우 길다. 

 

그렇지만 자신의 정적인 사울을 끝까지 살리려 했던

평화의 사람 다윗은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자기와 함께 하기를 기다렸다. 

 

다윗이 기다려야만 하는 이유도 당연히 있다.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사울과 함께 모든 부하가 그날 다 함께 죽고 말았다(1사무 31,6).

다윗이 사울과 삼십여 년을 함께하였기에

패배로 인한 그들의 손실과 마음의 상처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 다윗에게 매우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잘해주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2사무 1,24)라고 한

다윗의 애도의 노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다윗의 입장에서는,

필리스티아로 망명한 다윗이

비록 전장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다윗이

자신들을 공격하려 했던 적이나 다름없다.

그러기에 기다림과 망각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활의 노래, 요나탄을 위한 애가(2사무 1,1-27)

 

활의 노래, 요나탄을 위한 애가(2사무 1,1-27)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그 비옥한 밭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마라.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나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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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을 따르다 파멸한 이들을 위한 치유의 시간

 

다윗에게는 그들의 슬픔을 아우르고,

자신의 과거를 이해시키고 지울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울의 주검을 수습해 묻어 준

사울의 친척들인(판관 21,11-13 ☞ 아래 링크파일 참조)

야베스 길앗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 준다(2사무 2,6),

 

그리고 다윗 자신이 유다 임금이 되었다고

은근히 그들에게 말한다(2사무 2,7).

이는 자신을 믿고 따르라는 속내를 비춘 것이다. 

 

그렇지만 사태는 심상치 않았던 것 같다.

사울이 비록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지만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잘해 주어

그들이 사울을 매우 깊이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날 때

사울의 지파인 벤야민 사람 시므이(1열왕 2,8)가 

“꺼져라, 꺼져!

이 살인자야, 이 무뢰한아!"(2사무 16,7)라고 한 말처럼

이스라엘은 사울에게 매우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한편, 기브아인들의 만행으로(판관 19,11-30)

지파들로부터 거의 멸문지화를 당했던(판관 20,47-48)

벤야민 지파는 처신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을 것이다. 

 

북부 이스라엘 지파의 주류는 에프라임과 므나쎄이다.

이들은 이집트인의 유전자 일부를 물려받은 요셉의 자손들이다.

사울은 이들의 입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압살롬 반란 후

'벤야민 사람'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고(2사무 20,1),

솔로몬이 죽자마자 '에프라임 사람' 예로보암이

북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것(1열왕 11,26)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벤야민 지파의 복권과 회복(판관 19,1 - 21,25)

 

벤야민 지파의 복권과 회복(판관 19,1 - 21,25)

벤야민 지파의 복권과 회복오트니엘에 의한 평화가 시작하자 단 지파는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떠나 북쪽에 있는 라이스를 공격하여 단 지파의 영토로 삼는다. 이렇게 사십 여년이 지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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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길을 가는 안타까운 이스라엘의 시간 

 

안타깝게도 북부 이스라엘인들은

다윗의 다른 면을 보지 못했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으므로,

사울의 적인  필리스티아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북부 이스라엘을 괴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때 갓으로 망명했던 다윗이(1사무 22,1-12)

유다의 임금이 되었기에,

필리스티아인들의 공격 심리를

어느 정도 억제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천사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한(1사무 29,9)

갓 임금 아키스에게도,

내 얼굴을 보아서라도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갓 사람 이타이가 다윗과 함께 할(2사무 15,19-21) 정도였으니

갓은 물론 필리스티아에서의 다윗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은

다윗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스 보셋을 임금으로 세운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대신하여

다윗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셨는데도(1사무 16,1)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임금이 되려고

그들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약자가 되어  있는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외침 속의 침묵'의 시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동은

참으로 이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탈출 32,9).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저질러 왔는데,

그 모든 짓을 너한테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1사무 8,8-9)

 

그러하기에

하느님께서 사울 대신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는데도(1사무 16,13),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이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윗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니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사울의 조카인 아브네르를(1사무 14,50) 부추기어

사울의 아들인 이스 보셋을(2사무 2,8)

북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고 다윗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다윗과의 계약을 하려던(2사무 3,12) 아브네르도

다수를 점하는 지파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의 싸움이 오래 계속될수록

다윗은 더욱 강해지고 사울 집안은 약해졌다(2사무 3,1).

 

이렇게 이스라엘은 해 볼 것 다 해 보고,

안 될 것 같으니 다윗에게 들어오려 한다. 

그래서 아브네르가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온 벤야민 집안이

다 좋게 여긴다."(2 사무  21,19)라고 하였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과 때를 어겼기에

아브네르와 이스 보셋의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2사무 3,27; 4,7).

 

다윗의 5년 여의 시간은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고자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었지만,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추억을 생각하는

'배반의 시간'이었다.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

'계약 이행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편안함을 위한

독선적 행위로 가득찬

'일탈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평화로이 온 이스라엘 왕국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했어야 하는데도

그들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버린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선택은

앞으로 또 다른 수많은 잘못들을 선택하게 될 것이니, 

다윗의 5년 여의 시간 동안의

'외침 속의 침묵의 시간'이 무엇인지 알았어야 했다.  


무도한 사람들에게 속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 

 

하느님의 역사는

당신의 계획에 따라 변함없이 지속된다.  

무도한 자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오만에 가득 차 있다.

 

무도한 자들은

분열의 역사를 통해 세상의 파멸을 보면서도,

억지로 모른 척하며

역사는 그저 반복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란

무도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역사를 삭제하고 오도하여

뒤섞어버리기 때문에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룩한 백성이란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인 자들로서

하느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느님의 역사는

당신의 계획에 의해

계시하신 바로 그때가 되면

반드시 이행될 뿐이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거룩한 백성은

공동선 안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향해 갈 뿐이다. 

 

하느님 말씀은 진리이고 참된 선이다. 

거룩한 백성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퍼지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눈을 가리고 입을 닫고 있으면 어찌 되겠는가?

눈멀고 귀 먼 이들이

세상을 이끌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생명이 아닌

'죽음의 숨'이 활개를 치게 해서는 안되니, 

당신의 거룩한 영

가슴속에 넣어 주신 분과(이사 63,11) 함께 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만하고 무도한 자들의 호도를 막지 못해,

자신은 물론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파멸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이 말한다. 

"내가 만일 내 죄악을 가슴속에 숨겨

사람들이 하듯 내 잘못을 감추었다면 

내가 만일 큰 군중을 두려워하고

여러 가문의 경멸을 무서워하여

잘못을 감추려 입 다물고

문을 나서지 않았다면......"(욥 31,33-34)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6)

 

 하느님께서

욥의 친구 테만 사람 엘리파즈에게 말씀하신다.

“너와 너의 두 친구에게 내 분노가 타오르니,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 42,7) 


에필로그

 

다윗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다. 

다윗이 비록 이민족 땅으로 망명을 갔지만(1사무 27,2), 

자신의 민족을 끝까지 도와주었다(1사무 27,8-12; 30,26).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다윗에 한정되지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 이외의 모든 이민족들도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는 다윗처럼 그리하였다. 

 

이러한 민족 정체성은 현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자신의 민족을 버리고 심지어는 팔아야 하겠는가?

내 민족이 없는데 어찌 내가 존재하겠는가?

 

어찌 정의와 공정이라는 대의를 버리고,

편협한 고집과 아집을 가진

이기심으로 가득찬 소수의 의견을 따라야 하겠는가?

 

그렇다.

지혜롭고, 귀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주님의 위대한 날이 가까웠다.

 

가까울뿐더러 득달같이 다가온다.

주님의 날에 들리는 소리는 쓰라리니

용사조차 비명을 지르리라."(스바 1,14)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호세 14,10)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이사 10,1-4)

하느님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므로(시편 33,5),정의의 원천은 하느님의 힘이다(지혜 12,16).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온전한 정의를 실천 할 수 있지만(지혜 15,3),하느님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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