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은(다니 9,27)
아론의 시나이 광야에 세운
수송아지도(탈출 32,4)
예로보암의 단과 베텔에 세운
금송아지도(1열왕 12,29) 아니다.
그것은 그리 하라 시킨
무지한 자들의 생각이요,
그리 시키니 따라 한
무도한 자들의 행동이다.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은
엣바엘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은 아합도(1열왕 16,31)
이제벨의 딸 아탈야를
아내로 맞은 여호람도(2열왕 8,18) 아니다.
그것은 그리 하라 시킨
무지한 자들의 생각이요,
그리 시키니 따라 한
무도한 자들의 행동이다.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은
두라 평원에 금 상을 만든
네부카드네자르도(다니 3,1)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세운
안티오코스도(1마카 1,54) 아니다.
그것은 그리 하라 시킨
무지한 자들의 생각이요,
그리 시키니 따라 한
무도한 자들의 행동이다.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은
저주를 내리게 하는 것,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의
무지하고 무도한 행동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열두 가지 저주를 내뱉는다.
'새겨 만든 우상이나 부어 만든 우상,
장인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은밀한 곳에 두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웃의 경계를
밀어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눈먼 이를
길에서 잘못 인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왜곡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웃을 은밀한 곳에서
쳐 죽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무죄한 사람을 살해하는 대가로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 율법의 말씀들을 존중하여
실천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신명 27,14-25)
그렇다면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무지하고 무도한 자들,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되는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온갖 음행과
마술을 일삼았기에(2열왕 9,22),
주님의 말씀대로,
창문으로 내던져져
담벼락에 피를 튀기며 죽어
개들에게 뜯어 먹힌 이제벨(2열왕 9,33-37),
왕족을 다 죽이고 임금이 되었지만(2열왕 11,1)
'말 문' 입구에서 칼에 맞아 죽은(2열왕 11,20)
그녀의 딸 아탈야가(2역대 23,15) 아니겠는가?
그렇다.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의 시작은
태초의 죄를 짓게 만든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운 과일도(창세 3,6)
부끄러움을 감추게 하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두렁이도(창세 3,7) 아니다.
그것은 그리 하라 시킨
무지한 자의 생각이요,
그리 시키니 따라한
무도한 자들의 행동이다.
그러하기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시듯(창세 3,24),
준엄한 진노를 갈아 만든 칼이(지혜 5,20)
예언자들의 거룩한 입을 통해 나오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신 하느님(요한 3,36).
이제,
당신께서 직접 나서시니,
정의를 가슴받이로 두르시고,
어김없는 공정을 투구로 쓰시며,
거룩함을 무적의 방패로 잡으시고,
잘 겨냥된 번개를 화살처럼 쏘시고,
분노에 찬 우박들이
투석기에서처럼 쏟아지게 하시어(지혜 5,13-22),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들을 치워 없애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아브라함에게 정의와 공정을
모세에게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게 하시고
그의 자손 다윗에게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게 하셨다.
그리하신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 베드 1,16)라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거룩한 입들이여!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거룩한 이들이여!
언제까지 골방에 들어앉아(마태 6,6)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뒤로 물러나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루카 5,32)
하느님의 거룩하신 아드님께서는,
왜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가?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들,
그 황폐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어찌 아직 치우지도 내버리지도 않는가?
지금도 가시관 쓰신 머리와
못 박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에 찔렸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삼위일체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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