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영성

이 시대, 왜 정의를 부르짖는가?

좋은생각으로 2025. 1. 11. 15:08

평화방송(PBC)화면 캡쳐

에필로그

마카베오기는 주로 BC 175년경부터 134년경까지의 

40여 년 간의 기록으로,

마카베오기부터 약 1300여 년 전에 발생한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40년 간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마카베오기에 나오는 역사적 질곡은

불의가 사회를 잠식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반면 광야에서의 40년은 

정의를 찾아가는 희망이 넘칠 때

찾아오는 숙명적인 필연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마카베오기는 하느님 말씀을 거스를 때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고,

탈출기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람이 받게 되는 자비로운 은총의 실현이다.   

 

흩어졌다 모인 이스라엘

유다가 바빌론 유배에서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해방되었지만

끊임없이 이민족의 간섭을 받았다.

 

그렇지만 오니아스 [▷BC 196-175]와 같은

경건하고 악을 미워한 대사제들 덕분에

민족의 정체성은 부단히 유지되어 왔다.

 

다시 분열된 이스라엘 사회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로

이스라엘은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은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 [▷BC 305-63]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데

친누이와 불륜의 근친혼을 하여

아들을 낳은 자로서 임금이 된 에피파네스가

시리아로 들어온다 [BC 175] (1마카 1,10). 

 

부도덕하고 불의한 자가 들어오니

유다의 무도한 자들이 발호하여 농간을 부린다. 

대사제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돈으로 대사제직을 사들이고 [▷BC 175] (2미카 4,7),

그리스 문화를 끌어들인다(2마카 4,10).

 

그 뒤를 이은 메넬라오스는

추악하게도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여

대사제직을 샀다 [▷BC 172].

과연 혐오스러운 임금이 무도한 자에게 매관매직을 한 것이다. 

 

다시 정의와 공정이 사라진 유다

사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자

마침내 거룩한 성전에 신성 모독이 벌어진다. 

혐오스러운 자인 에피파네스가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운다 [▷BC 167.12.3] (1마카 1,54),

 

이 과정에서 메넬라오스는 모사를 꾸며

경건한 오니아스를 살해한다 [▷BC 171] (2마카 4,34).

메넬라오스는 권력자들의 탐욕 덕분에 대사제직을 유지하면서

줄곧 악에 집착하여 동족을 반역한 것이다(2마카 4,50). 

 

한편 메넬라오스에게 대사제직을 뺏긴 야손이 

동족을 적군이라 생각하며,

동포를 무자비하게 학살한다(2마카 5,6).

 

거룩한 사제직을 돈으로 사들여

대사제가 된 자들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불의하고 불공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위와 안위를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심지어는 몰살시키기까지 하는 참극을 벌인 것이다.

 

정의로운 백성의 투쟁

이제 정의로운 백성이 투쟁을 시작한다(1마카 2,29). 

내란과 외란이 벌어진 것이다. 

유다는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백성 천 명이 살해된다(1미카 2,38)

성소는 짓밟히고 성채가 점령되어

이민족들의 거처가 된다(1마카 3,45)

 

여러 전투를 거쳐 결국에는

유다 마카베오가 맞서 싸워

오천 명을 쓰러뜨리고 승리한다(1마카 4,34)

마침내 3년이 지나 [▷BC 164. 12. 14],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백성들에 의해(1마카 2,29) 

성전이 정화되어 봉헌된다  (1마카 4,52).

 

또다시 발생한 불의 

이렇게 성전이 정화되고 봉헌되었지만

또 다른 악들이 등장한다.

 

근친혼을 한 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의 누이와 또다시 근친혼을 한

임금 소테르가 들어온다(1마카 7,1).

 

한편 알키모스가 소테르 임금에게

자신의 백성을 고발하고

대사제가 된다(BC 162-159).

바로 소테르와 알키모스가 새로 등장한 악이다. 

 

사제인 알키모스가 이민족의 편에 서서

자신의 백성을 공격하여 도륙한다(1마카 7,16). 

 

또한 알키모스는 대사제라는 직분을 가졌음에도

감히 성소에서 신성모독을 저지른다.

예언자들의 업적을 없애 버리려고

성소 안뜰의 벽을 헐어버리라고 명령한다(1마카 9,54).

 

그러자 대사제 알키모스가 갑자기 쓰러진다.

입이 막히고 굳어버린다. 

말을 못하게 된다. 

큰 고통 속에서 죽어버린다 [▷BC 159.5) (1마카 9,54-57). 

 

이에 시리아 장수 바키데스가 본국으로 돌아가니

유다에서 잠시 동안 전쟁이 멈춘다. 

 

정의로 척결된 무도한 자들

무도한 자들의 준동이 계속된다.

그들은 다시 바키데스를 끌어들인다 [▷BC 157] (1마카 9,57)

무도한 자들의 음모가 발각된다. 

요나탄과 그의 군사들이

악행을 주도한

유다 지방 사람들 50명가량을 잡아 죽인다(1마카 9,61).

 

마침내 바키데스의 원정 계획이 허사로 돌아간다(1마카 9,68).

바키데스는 이 지방으로 진격하기를 권유한 무도한 자들에게

몹시 화를 내며 그들을 많이 죽인다.

그러고 나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기로 작정하고(1마카 9,69)

요나탄과 화친을 맺는다(1 마카 9,71).

 

드디어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멈준다.

요나탄은 미크마스에 자리를 잡고 백성을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사악한 자들을 없애 버린다.(1마카 9,73)

 

에필로그

그 때 바로 이 시기에 어찌 이러한 분쟁이 일어났는가?

 

사제직과 같은 거룩한 권위를

권력으로 삼고자 하는

교활한 마음의 사악하고 무도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러한 자들이 어찌 발호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러한 사악하고 무도한 자들에게 동조하며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고자 하는 

불의하고도 비겁한

그리고 탐욕스러운 무능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롭다면

자신의 능력만큼 바랄 것이고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배려할 것이고

개인보다는 공동선을 위해 베풀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정의롭지 못한 자가 권력을 잡을 때 

치명적으로 불어닥치는 피바람에 대해,

성경이 마카베오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불의한 인간들이 권력을 잡을 때 일어나는 참상을

성경이 역사사의 마지막에서

마카베오기를 통해 기술한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마카베오기로부터 200여 년 뒤에 등장하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복음을 이해하고,

사도들이 순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카베오기는,

보편 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성경 역사 안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정의와 공정,

즉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창세 18,19)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음

사실과 증거를 들어 분명히 적시한다.

   

과연,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지만

'선택하신 이유'를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말씀을 믿는 모든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이 선택된 이유가 됨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선택하였으니

내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선택 이유를 알고 그대로 실행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게 하여라.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창세 18,19)


▶관련 파일

 

 

하느님의 새 계약으로 향하는 디딤돌, 마카베오기

프롤로그큰 나라 임금들 간의 싸움에조그마한 유다라는 민족이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쓰러진다. 모욕에 치욕이 더하여비참함과 처참함으로 뒤틀린 유다 민족에크나큰 하느님의 진노가 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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