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예레 20,14)
다윗을 임금으로 세운 사무엘이(1사무 16,13)
어린 나이에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겼는데,
예레미야는 바로 그 엘리의 자손이다.
엘리는 실로에서 하느님의 사제로 봉직하였으나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한 자들로서 주님을 알아 모시지 않았다(1사무 2,12).
엘리가 98살이 되고 눈이 굳어져 앞을 볼 수가 없을 때(1사무 4,15)
계약 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기고 그의 두 아들이 죽자(1사무 4,11),
40년 동안(BC 1134-1094년)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했던 엘리는
대문 옆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는다(1사무 4,18).
이는 "내가 너의 기운과 네 조상 집안의 기운을 꺾으리니,
네 집안에는 오래 사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1사무 2,31)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행 된 것으로,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엘리의 자식들이 지은 죄와
자식들의 죄를 탓하지 않은 엘리 때문임이 분명하다(1 사무 2,22-26).
이처럼 하느님의 계약 궤가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실로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니,
성막인 '만남의 천막'이 있는 실로는(여호 18,1)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예레 26,6)라는
멸망에 대한 비교 대상의 주체가 되어 버린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나는 엘리 집안에게,
그 집안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는
영원히 속죄받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였다."(1사무 3,14)라는
바로 그 집안의 후손이니,
예레미야의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예레 20,14)이라는 외침에는
예레미야의 삶의 참담함을 보여주는
비탄과 절규가 그대로 들어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라고 말씀하시면서
비참한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있는 예레미야를
천연덕스럽게 부르신다.
이때는 유다 임금 요시야의 통치 13년인 BC 629년으로
계약 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폐허가 되고(BC 1094) 나서
465여 년이 지난해이다.
따지고 보면 오백 여년 동안 질시와 멸시를 받아 왔던
예레미야의 집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손길을 내리시니
태중에서 성별된(예레 1,5) 예레미야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펴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의 부름이 내린 이유는,
하느님의 궤를 빼앗기고
성소가 있는 실로가 파괴되어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1사무 2,31) 집안이라는 굴레 안에서,
오백여 년을 핍박과 따돌림을 받아 가면서
굳건히 살아온 집안의 예레미야만이
그 시대 즉 유다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 온 그 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순명과 담대함으로 이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는 예루살렘의 전형이다.
실로의 성소는 예루살렘의 성전이니
실로의 파괴에 빗댄 예루살렘의 폐허는
참으로 참혹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유다 백성들이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예레 26,9) 하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든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거침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쏟아낸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예레 26,4-6)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예레 26,5)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예레 7,25)라는 말씀처럼
유다는 끈질기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예언자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이다.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다.
역사를 감추고 속이고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그릇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 즉 진실을 속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므로,
신앙은 물론 실제적으로도
개개인의 삶이 모여 이루어진 역사를 속여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속이는 것으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속이는 자가,
속이는 자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찌 의롭게 되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성경은
성경의 인물들이 벌여온
수많은 그릇되고 오욕된 일이라도
아무런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와 아울러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방법도 알려준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전하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성경을 삶의 지침서로 삼아
뉘우치고 통회하여 회개하는 인생 여정을 이끌어가야 한다.
예레미야가 절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것이냐?
실로가 폐허가 되듯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가게 된 이유는
역사의 실체를 거부하며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편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절규는
모든 시대의 거짓 행위자들의 행태에 대한
하느님의 참담한 외침이며,
예레미야의 절규는
하느님께서 지금껏 내려주신
사랑과 자비로 돌아오라는 권고이며
예레미야의 절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인
정의와 공정이 모든 세상에 넘쳐흘러야 한다는 단언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 그 시대에 대한 책임은
그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귀속된다.
그러한 귀책에 대해 성경은
유다 민족의 삶을 끌어내면서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유다의 멸망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도한 사람들이 저지른 결과임을 보여준다.
그렇다.
"무지한 자들에게 지혜는 얼마나 어려운가!
미련한 자는 지혜 안에 머무를 수 없다."(집회 6,20)
"무도한 자들의 봉헌물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집회 34,22)
또한 무지하고 무도한 자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에 대고 도움을 탄원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 대고 여행을 위하여"(지혜 13,18)
"또 생계와 일과 생업의 성공을 위하여
손에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에 대고 힘이 되어 주기를 빈다."(지혜 13,19)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무지와 무능과 무도함을 싫어하신다.
왜냐하면 이들 단어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와
하느님을 알 수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능한 자
그리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도한 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은 지혜를 가르친다.
따라서 성경은 정의롭지 못한 자들이 이끄는
공정하지 못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실증적 증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능하고 무도한 자들에 의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와 불공정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지해서 그것들을 버릴 생각을 못한다."(바룩 6,41)
"하느님을 잘못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그들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 속에 살아가면서
그토록 커다란 여러 악을 평화라고 부른다."(지혜 14,22)
그런데도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도한 자들이 떠드는 소리에 현혹되어
그 시대의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문제는 생각지도 않고
오직 이기심과 질투심에 그러한 자들을 추종하는 자들도
유다처럼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무지몽매한 자들임이 자명하다.
그렇다.
예레미야의 한 맺힌 절규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의인들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라는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 거룩한 응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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